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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이야기

by Mayan 2023. 5. 20.

 

역사적으로 부채는 생활 문화 속 기능적 도구에서 예능, 예술, 문화의 도구로 확장되어 문화적 특성을 갖는다.1) 《조선왕조실록》(1392-1863)에 쓰인 부채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 선조의 일상, 혹은 풍속에서 부채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부채의 쓰임은 다음과 같았다.

 

열기를 식히는 용도
얼굴을 가리는 용도
시를 지어 기록하는 용도
부채에 글을 써 말을 전하는 용도
부채를 흔들어 서로 호응하는 용도
단오절에 진상, 선사하는 물품
조정에서 개최한 각종 의식의 의물 중 하나
왕가에 바친 외교 진상품, 공납품 중 하나
대신, 군사들에게 내리는 하사품 중 하나

 


당시 부채는 궁중과 민가에서 전방위적으로 사용되는 물품이었으며, 현대에서의 쓰임보다 더 폭넓게 활용되었다. 더위나 질병으로 인한 열기를 식히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인들이 시를 지어 기록하거나 글을 적어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전달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부채를 이용한 손짓으로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였고, 조정의 각종 의례에 의물로 사용하였다. 또한 단오절마다 주고받는 선물이었으며, 왕가에 올리는 진상품, 대신과 군사들에게 내리는 하사품 목록에도 빠짐없이 등장하였다. 특히 《태종실록》(1401-1418)부터 《순조실록》(1800-1834), 이후 《고종실록》(1863-1907)까지 부채에 관한 언급이 두루 나타나고 조정의 대신들이 부채의 규격과 재료, 장식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부채는 조상들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일종의 필수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채속에 담긴 민화

 

 

 

조선 후기, 대학자요 글씨로 유명한 김정희와 부채(扇子)에 얽힌 얘기 한 토막.

 

김정희가 하루는 외출을 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못보던 부채짐이 놓여 있었다. 청지기에게 "웬 부채짐이냐"고 물었더니 "부채장수가 부채를 팔러 왔다가 해가 저물어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해 객방에 들였다"고 대답했다.

 

그런가 하고 사랑채로 들어가 앉았는데, 그날 따라 심심한데다 부채에 글씨를 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청지기더러 그 부채짐을 마루에 들여놓게 하고는 부채를 한아름 꺼내 쓰고 싶은 글귀를 쓰기 시작했다.

 

이튿날 부채장수가 떠나려고 보니 주인 영감이 부채에 잔뜩 글씨를 써놓지 않았는가. 부채장수는 물건을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며 탄식했다.

 

이를 본 김정희는 "추사선생이 쓴 글씨부채라 하고, 값을 몇곱절 내라고 하면 다 사갈 것이니, 자네 나가서 팔아보게나"하였다. 부채장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거리에 나가 일러주는 대로 하였다.

 

그랬더니 부채가 순식간에 다 팔리고 말았다. 재미를 본 부채장수는 김정희를 또 찾았다. 그러자 김정희는 "그러한 것은 한 번으로 족하지, 두 번을 해서는 안되네"하고 써주지 않았다.

 

방구부채, 접부채

부채는 크게 방구부채(둥근부채)와 접(는)부채(쥘부채)로 나뉜다. 방구부채는 부채살에 깁(紗)이나 비단,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부채다. 접부채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부채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것이다. 전국적으로 접부채는 전주, 방구부채는 남원의 생산량이 가장 많다.

 

원래 방구부채는 중국이, 접부채는 일본이 역사가 오래되었다. 부채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견훤조'에 나온다. 고려 태조가 즉위하자 견훤이 그 해 8월 공작선(孔雀扇)과 대화살(竹箭)을 보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전주는 그 만큼 부채의 역사가 깊다. 곧고 단단한 대나무가 많았고 무엇보다 질 좋은 한지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주사람들의 예술적 감각이 덧붙여졌다. 그래서 전주의 부채를 제일로 쳤다.

 

 

 

전통부채 - 전통부채 - 비잠공예

전통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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